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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강병 .송

청년 시절부터 자신감, Can Do, 하면 된다!

by 낙동강. 2022. 11. 24.

2022년 11월 25일(금) 오후 5시 우리공화당 LIVE에서 '박정희 대통령 통치력 특집' 방송.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제43주기와 탄신 제105주년, 국모 육영수 영부인의 탄신 제97주년을 맞이해서 박정희 각하의 일생에 대한 특강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국정 운영 비전을 가지고, 난세에 국정을 수행했고, 위기의 순간마다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탁월한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 역할을 한 훌륭한 통치자의 리더십을 우리공화당은 계승해야 한다.

박정희 각하의 탁월한 리더십은 청년 시절부터 축적된 지혜와 능력의 발휘였다. 

지난 10월에 제1차로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에 대해서 방송을 했는데, 상해 임정의 밀명에 의해서 만주신경군관학교에 늦은 나이에 입학을 했고, 수석 졸업으로 졸업을 하게 되어 당시 식짐지 조선의 상황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입학할 수 없었는데, 일제는 아시아 최고의 청년 엘리트들이 입학하는 육군사관학교에 편입을 시켜주었다. 

박정희 청년은 당대 아시아의 최고 엘리트 청년으로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제1차 특강>

https://www.youtube.com/watch?v=k75TKRIACi8&t=8s

 

이번 제2차 특강에서는 지난 특강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중요한 내용을 방송한다. 

만주신경군관학교와 일제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은 '친일파'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대 아시아의 최고 엘리트라는 의미이며, 이것이 나중에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는 배경이다. 

1. 만주신경군관학교 수석 졸업의 의미.

당시 일제는 만주를 지배하고 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만주군의 장교 양성을 위해 만주신경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일본계, 중국계, 만주계, 몽고계, 조선계의 엘리트 청년들을 모집했는데, 박정희 청년은 상해 임정의 밀명을 받고 동기생 보다 4살이 많은 늦은 나이에 입학을 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제는 수석 졸업생 박정희 생도를 중심으로 만주신경군관학교를 선전 홍보하는 영화를 제작하여 만주, 몽고, 조선 식민지 학생들에게 상영했다. 

강문봉(1923-1988년) 청년은 함경도 출신으로 만주국 은행장 출신의 강윤철의 장남으로 만주국 내의 제1의 명문학교인 신경 제1중학교(5년제)를 졸업할 때 이 영상을 보고 감동을 받아 만주신경군관학교 제5기생으로 수석 입학과 수석 졸업을 했고, 역시 일제는 육군사관학교로 편입을 시켜 제59기생으로 졸업했다. 

박정희 청년과 나이는 6살 차이지만 사관학교는 2년 후배였다.

강문봉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하자마자 광복을 맞이하자 곧바로 월남하였고,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110명 중에 군번 17번) 출신으로 창군 멤버로과 국군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강문봉은 1년 늦게 입국하여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 박정희 청년보다 이제는 3계급이 높은 국군 선임이 되었다.

2. 박정희 청년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여러 병과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를 선발하는 포병 병과에서도 3살 아래 동기생인 1등 이한림에 이어 3등(우수생)으로 졸업했다.

당시 군국주의 일본제국에서 당대 최고 엘리트들이 입학하는 학교는 동경제국대학 법과나 경제과가 아니라 '육군사관학교'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 출신의 박정희 청년은 일제의 최고 청년들과 경쟁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당대 아시아의 최고의 엘리트라는 의미이다.

27세의 박정희 청년이 일제 육군사관학교 우등 졸업생이라는 의미는 15년 후에 확실하게 증명이 되는데, 44세 박정희 장군이 5.16 혁명에 성공을 하여 국가재건최고위원회 의장으로서 44세 동갑 케네디 대통령의 국빈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가는 중 일본을 경유했을 때 나타난다.

박정희 의장이 일본을 경유하여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당시 현직 수상 하야토가 직접 공항에 나와 영접을 하고, 박정희 의장의 기자회견을 배석했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이후에 일본의 국가 원수(수상)으로서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실무 방문 초청을 받은 첫 수상이 바로 1년 전 기시 노부스케 수상이었다.

그런데 1년 후 5.16 혁명 지도자 박정희 장군은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국빈 초청을 받았고, 일본을 경유했을 때 현직 수상 하야토와 전직 수상 노부스케가 영접하고 회담을 했다. 

3. 박정희 대통령의 최후 외교 국정인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과 정상회담.

당시 아시아 지도자로서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는 두 지도자가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싱가포르의 리콴유(이광요) 수상이었으며, 태평양 전쟁 후 독립한 약 120개국 중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두 나라의 지도자로서 선의의 경쟁적 관계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리콴유 수상을 여러 번 국빈 초청을 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리콴유 수상을 응하지 않다가 자신의 멘토인 칸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멘토였고, 꼭 당신이 만나야 할 지도자라는 권면을 듣고 1979년에 드디어 초청에 응했다. 

리콴유 수상은 대한민국을 방문과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서 먼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프로필을 조사했는데, 맨 처음에 기록된 것이 '일제 육군사관학교' 우등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보고 화일을 덮어버렸다.

"일제 육사 수석 졸업생"이라는 뜻은 당시 아시아의 최고 엘리트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1942년 2월 일제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 제국'의 식민지 싱가포르를 점령할 때 영국계 영어권 중국인 청년이었던 리콴유는 아시아의 작은 섬 나라 일본에게 대영제국이 패배한 것에 대한 큰 충격을 받았다.

리콴유 청년 동시에 '어! 일본인도 했어! 그럼 중국인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 싱가포르의 국부가 되어 아테네 이후에 최고의 도시 국가를 건설했다.

일제가 싱가포르를 점령하여 당대 최고 엘리트 청년인 리콴유를 '정보국'에서 일하도록 했는데, 리콴유 청년이 이 때 일본 제국의 아시아의 강대국이 된 비결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아시아의 강대국 일제의 최고 엘리트 집단인 육군사관학교의 우등생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4. 박정희 청년을 만주군 소위로 활약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일제의 관동군 상황을 파악하여 미군에게 정보를 제공했으나 미군이 미처 정보를 활용하지 못하고 소련군의 진주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아주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관동군의 주력을 동남아 전선에 이미 이동시켜 만주 지역은 무주공산과 같은 상황이었고, 이러한 정보를 상세히 파악하여 전달했던 것이다. 

결국 소련군은 대일선전포고를 하자마자 진격하여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한반도까지 쉽게 진주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년 시절부터 탁월한 군사 정보 작전 능력을 발휘했고, 당대 일본제국의 엘리트들과도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여 이겼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결국 5.16 혁명을 통해 대한민국을 급속하게 발전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하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