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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사회 "박정희: 경제 대국을 꿈 꾼 남자"

낙동강. 2024. 6. 29. 21:54

2024년 7월 3일(수) 2시, 강남 코엑스 메가 박스 2관, 관람료 9,000원.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님 참석과 시사회 전에 인사말.

제2의 박정희 통치 계승 지도자의 부상과 흥행 위해 총동원 참석.

감독, 손현우.

제작, 김지운.

영화사, 파이브 데이 대표사 정성렬.

<영화 포스터> 뮤지컬 "박정희"에 "국모 육영수 영부인" 부분을 추가하여 영화로 제작.

2023년 7월 10일(수)부터 전국 메가 박스에서 상영하면, 시도당별로 총동원하여 단체 관람.

그래도 첫 시사회 붐을 일으키는 북적거리는 참석 중요.

<역사 카드>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을 포스터에 활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왼손잡이(양손잡이)로 방향을 지시할 때나 활을 쏠 경우 왼손을 사용하고, 사격이나 그림을 그릴 때는 오른 손을 사용했다.

1967년 5월 3일(수)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 포스터로 활용했다.

1967년 2월 2일(목) 장녀 박근혜 영애의 15살 생일날, 장충 체육관에서 박정희 제6대 대통령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승리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이 연설 내용을 "중단 없는 전진을"이라는 구호로 사진과 함께 후보 포스터로 제작했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조상들이 못다한 과업, 우리가 이룩하자"는 슬로건과 함께 제6대 대통령에 당선, 재선을 성공했다.

민주공화당 상징은 끈기 있게 일 하는 '황소'로 쉬지 않고 열심히 '일 하는 정당'으로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우측 사진은 박정희 후보가 민주공화당 당기와 함께 당의 로고를 장식한 연단에서 선거 유세 연설을 하는 모습이다.

<영화 소개 팜플렛> 영화 마지막에 출연진이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하는 중에 박정희 각하의 업적을 소개한다.

* 인류 역사상 최단 기간 내에 이룩한 한강 기적은 이미 5.16 반공 무혈 구국 혁명의 목적과 목표였다.

국부 이승만 박사께서 시작한 '한강 기적'이 장면 내각제 정권의 실정으로 무산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극심한 사회 혼란을 틈타 제2의 기습 남침 위기가 닥치자 박정희 장군은 생명을 걸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박정희 장군의 혁명 목적은 '질서의 확립'이었는데, 무질서와 혼란은 경제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국방 안보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1950년 6.25 기습 남침과 10.29 중공군 기습 개입에도 불구하고 적화 통일에 실패한 공산 독재 세력은 언제든지 제2의 기습 남침으로 적화 통일을 하려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박정희 장군은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의 반공 기강을 확고히 하고, 사회 각 분야의 '질서 확립'을 통해 체제 안정 속에서 다시금 한강 기적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5.16 혁명 공약의 핵심은 '국방 안보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룩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국방 안보를 튼튼히 하면 경제 발전을 투자가 미흡하고, 경제 발전에 주력하면 국방 안보가 어느 정도 희생될 수 밖에 없는데, 국방 안보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 같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겠다는 것이 박정희 장군의 비전이었다.

1917년생 서양의 천재 청년 지도자 케네디 대통령은 동갑인 동양의 천재 청년 지도자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 박정희 대장의 생일에 국빈 초청하여 한미 정상회담을 했다.

박정희 장군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역사 카드> 사진 좌측, 1961년 5월 18일(목) 5.16 혁명 성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 중에 하나인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지지 퍼레이드와 성명서 낭독 때 시청 광장에서 생도들을 환영하고 바라보는 모습이다.

L-R, 공수 특전 부대 부댕장 박치옥 대령,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 소장, 제2군 부사령관 비서 이낙선 소령.

사진 우측, 백악관에서 동서양의 44세 동갑 천재가 회담을 하는 모습으로 통역을 담당한 전주 예수 병원 원장 구바울(Paul Crane) 의료 선교사와 주미 대사관 무관 비서관 박보희 중령이 배석했다.

영화 포스터에 사용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도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보통 휘호는 신년 1월 1일에 새해 각오나 국정 지표 등의 의미를 담아서 쓴다.

1974년 5월 24일(월) 제8대 박정희 대통령께서 5.16 혁명 제13주년을 지나고 일주일만에 특별히 쓰셨다.

당시 중동의 오일 쇼크로 인한 세계 경제 위기,

냉전에서 화해로 변화하는 국제 외교 전략,

대한민국에게 모든 면에서 추월을 당하기 시작한 북괴 공산 집단의 최후 발악적인 대남 공작,

국내 종북 좌파의 민주화를 가장한 극심한 반 정부 데모로 인한 정국 상황은 그야말로 '한강 기적'을 완성하는데 최대 고비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국방 안보와 경제 부흥이라는 한강 기적 완성"을 위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를 쓴 것이다.

<역사 카드> 사진 좌측,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는 최초로 미국 항공모함 CV-41 미드웨이 호를 방문했다.

국부 이승만 박사는 원자력 연구원을 시작하면서 핵 항공모함을 상징하는 '원자 기계(Atomic Machine)'에 대한 비전을 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직접 항공모함을 시찰한 것이다.

국부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각하께서 품은 국방 안보 완성의 상징은 핵 추진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보유하는 것이었다.

사진 우측,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 기적을 성취할 수록 기존의 대 한국 원조나 차관 등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 경제의 기본인 국민의 의식주 생활 중에 '식량 자급 자족'을 이룰 때까지 우선 전년도 9월 미 의회에서 중단시킨 미국의 "농산물 장기 저리 차관"에 대한 재 공여을 성사시켰다.

즉 이렇게 국방 안보와 경제 발전의 중요한 고비에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를 쓰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를 쓰신지 3개월만에 문세광의 암살 시도가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암살을 피했지만 안타깝게도 육영수 영부인이 서거했다.

1895년 10월 8일(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80년만에 또다시 북괴 대남 공작에 의해 자국 내에서 영부인이 시해를 당하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1974년 말 제8대 박정희 대통령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심정으로 역사의 평가를 후대에 맡기면서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 재 신임 투표를 결정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은 '국제 정세, 대남 공작, 국내 정국' 3가지 동시에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위기 상황에 국민 통합과 질서 확립을 위해 '유신 헌법'에 대한 재 신임 국민 투표는 80%에 육박하는 투표율에, 과반수를 훨씬 넘는 73%의 찬성율 즉 국민의 전폭적 지지로 통과되어 한강 기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역사 카드> 사진 좌측,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헌법' 재 신임 국민 투표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1975년 6월 타임 지는 3가지 국내적으로 위험한 위기 요소에도 불구하고 한강 기적을 성취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한국: 새로운 위험들(KOREA: NEW DANGERS)"라는 제목과 함께 표지 인물로 선정했다.

1975년 6월 22일(주) 박정희 대통령은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보다 더 강렬하게 한자로는 충무공 이순진 장군의 난중 일기에 기록한 "필사즉생, 필생즉사"이라는 휘호를 쓰시고, 한글로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휘호를 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