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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7대 루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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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동강. 2025. 2. 1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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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永川朝陽閣韻


江南遊客永陽1)回, 天畔2)高樓壓水開。
落木西風3)鴻鴈去, 碧梧4)何日鳳凰來。
廢興有數還千古, 逢別無端且一盃。
玉笛聲殘人不見, 空留明月獨徘徊。
遊軒先生文集卷之二

차영천조양각운(次永川朝陽閣韻)
강남(江南)의 나그네가 영양(永陽)으로 돌아가니
하늘 가에 높은 누각이 강을 누르고 열려있네
잎이 떨어진 나무에 서풍이 부니 기러기 날아가고
벽오동 나무에는 어느날에 봉황새가 날아올꼬
흥망은 정하여진 운수가 있으나 오히려 영원하고
만남과 이별은 까닭이 없으니 우선 한잔하시게나
옥(玉)피리 소리 남아 있으나 사람은 보이질 않고
공연히 남아 있는 밝은 달만 홀로 배회(徘徊)하네

주1) 永陽: 경상북도 영천의 옛 이름

주2) 天畔: 하늘가

주3) 西風: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가을바람

주4) 碧梧: 오동, 벽오동
부주(附註):
위의 시는 유헌(遊軒) 장석룡(張錫龍, 1823년~1908년)이 쓴 것입니다. 

그의 자는 진백(震伯), 호는 유헌(遊軒), 운전(雲田)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玉山)입니다.

그는 1823년 10월 17일, 인동(仁同) 오산리(吳山里)에서 태어났습니다.

14세 때인 1836년에는 종부(從父) 장적(張𣚅)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44세이던 1866년에는 본생제(本生弟) 장석구(張錫龜)의 아들

장승원(張承遠)을 후사로 삼았습니다.

그는 1910년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저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년 ~ 1637년 9월 7일))의

후손으로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영남 지방의 유학자이다.

저자의 사자(嗣子) 장승원(張承遠, 1853~1917)의 아들이

장택상(張澤相, 1893~1969)입니다.
흔히들 영남지역에는 누각이 많고,

호남지역에는 정자가 많다고 합니다.

영남의 7대 누각으로 꼽히는 것으로는 밀양의 영남루를 비롯하여

진주의 촉석루, 안동의 영호루, 울산의 태화루, 양산의 쌍벽루,

김천의 연자루, 영천(永川)의 조양각이 있습니다.
위의 시의 제목을 번역해 보자면

‘영천조양각운에 차운하다’ 정도가 됩니다.

영천 조양각은 영남의 7대 누각으로 꼽힐 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역대의 문인 시인묵객들이

영남 조양각을 주제로 시를 짓고 읊었을 겁니다.

장석룡의 시 이외에도 동일한 제목의 시로는

구사맹(具思孟, 1531년~1604년)이 지은

<차영천조양각운(次永川朝陽閣韻)>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장석룡이 지은 위의 시는 언제 지어진 것인지

그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힘듭니다.

참고로 저자의 행력을 고찰해 보면 1858년 9월에

현풍현감(玄風縣監)이 되었습니다.

그해에 접위관(接慰官)으로 부산(釜山)에 가서 永嘉臺를 유람하다.

1859년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참배하고

유가사(瑜珈寺)를 유람하였습니다.

그해 7월에 김규한(金奎漢), 김규응(金奎應)과

도동서원 근처 강에서 뱃놀이하였습니다.

1868년에는 겨울에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습니다.

1875년 5월에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행력을 고려하면 36세~53세,

특히 36세, 37세, 46세, 53세 때의 어느 해에 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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