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아요. 세상의 이치, 즉 진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처음 출가했을 때,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확실한 발심 없이 출가를 했어요. 그때는 깨달으면 공중을 붕붕 날고 대단한 신통이 나온다고 생각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그런데 스님이 되어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하면 할수록 불교의 가치를 알게 되고 스님이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깨달음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야 합니다. 깨달음이 뭡니까? 화엄에서는 깨닫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일의제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어요. 그럼 제일의제가 뭐냐? 연기의 법칙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법계 연기로 보면 이 세상에는 절대 가치가 없고, 결코 우열이 없고 상하가 없습니다. 다만 차별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걸 알면 남자가 여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자식이라도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연기의 법칙을 깨달으면, 너는 나의 다른 모습이고, 동물도 사람의 다른 모습이고, 더 나아가면 나무나 풀도 부처의 다른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연결되어 하나이고 나아가서는 나무도 풀도 모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오염시키면 나무가 죽고 나무가 죽으면 사람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고 이것이 잡화의 세계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만 옳다는 독선적인 생각으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손바닥과 손등을 봅시다. 손바닥이 하는 일이 많다고 손등을 없앨 수는 없어요. 손등은 손바닥의 다른 모습임을 알고 둘 다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화엄의 세계관입니다. 화엄의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 세상은 훨씬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신도님들이 공부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어요. 하나는 길을 배우는 공부가 있고, 또 하나는 실천하는 공부입니다. 길을 배우는 공부는 교리죠. 길을 알아야 그 길을 갈 수가 있으니 교리를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로 하는 불교나 지식으로 하는 불교는 100점짜리 불교가 아닙니다. 요즘은 말로 하는 사람이 많아요. <화엄경>에서 ‘가난한 사람이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센다 하더라도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없다. 많이 듣는 것도 그와 같다’고 비유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리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실행이 중요합니다. 땀 흘려 참회하고 기도하고 간경하고 참선하고 실지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화엄적으로 얘기하면 십바라밀을 행해야 합니다. <화엄경>에서 보살이 닦아나가야 행의 길로 십바라밀이 나와요.” 스님은 십바라밀을 얘기하면서도 구체적인 덕목들을 나열하지는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하나를 알아도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등 십바라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남의 보배를 하루 종일 세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따끔한 지적이다. “종교를 믿는 것은 실천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부처는 지(智)와 자비(慈悲), 행(行)이 갖춰져야 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지라는 것은 후득지가 되지 않으면 자비가 안 나와요. 단순히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는 소리를 아무리 해도 자비심이 없으면 행이 따르지를 않아요. 오히려 아는 것만 많은 사람 옆에 가면 불편할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고통에 처한 상태를 알고, 그 고통을 덜어주려는 자비심을 내고 실제로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행을 했을 때 진정한 종교의 가치가 발휘되는 것이죠. 모셔온글
•―·······명상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