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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의추억

독도는 우리땅

by 낙동강. 2011. 4. 28.



독도의 동(東)도에 있는 한반도 모양의 지형.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독도에 우체통이 생긴 것은 2004년 3월. 우편번호는 799-805. 그 전까지는

우편 번호조차 없었다




독도의 동도 선착장에 있는 대한민국 동쪽 땅끝 표석. 1997년 11월 7일 접안시설을 준공한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알리고 있는 표석. 이 표석은 지난 1954~1956년 독도의용수비대가

일본의 독도침략 야욕을 물리치면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 무렵 서도의 모습.



1953년 독도에서 ‘다케시마’를 뿌리뽑다 [도깨비 뉴스]


1953년 10월15일 독도의 동도에 상륙해 일본인들이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내는 한국산악회 회원들.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시마네현의 고지(告知)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 (1905년) 2월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를 3월19일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한 데 이어, 2월23일에는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가 외신과의 회견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 우리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런 가운데 6·25전쟁(1950) 직후 한국 사회가 독도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진귀한 사진이 다량 발견되었다.

이 사진은 1953년 10월15일과 16일에 김한용(金漢鏞·81)씨가 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과 함께 해군 905정을 타고 독도에 들어가 찍은 것. 김씨는 오랫동안 광고사진 작가로 활동해왔고 최근까지 중앙일보 문화센터에서 사진 기술을 강의해온 원로다.

독도 탐사 직후 발간된 당시의 한국산악회 회보에는 김씨가 찍은 사진이 몇 장 실렸고, 이를 복사한 사진이 지금까지 유통돼 왔다.
그러나 김씨가 갖고 있던 원판 사진은 단 한 번도 공개된 바 없다. 김씨는 지난해 3월26일부터 4월4일까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80세 기념 작품전을 열며 이 원판 사진을 공개했으나, 어떤 언론도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주간동아와 접촉해 이를 최초로 공개했다.

김씨 사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한자로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쓰인 2m가 넘어 보이는 나무 말뚝을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뽑아내는 장면(사진 맨 위). 기록에 따르면 이 나무 말뚝은 6·25전쟁 발발 2년째인 1952년 6월25일 미국 성조기를 단 일본의 수산시험선을 타고 독도에 상륙한 9명이 박았다고 한다(김씨는 “이 말뚝이 나무로 제작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오치군은 69년 지금의 오키군 隱岐郡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전면에 ‘독도’ ‘獨島’‘LIANCOURT(리앙쿠르)’를 새긴 표석을 설치하는 홍종인 한국산악회 회장. 홍 회장은 ‘이 표석은 넓이가 두 자가량, 높이는 자가웃, 부피는 한 자 조금 못 된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한 자는 약 30.3cm이다)

한국산악회는 이 말뚝을 뽑아낸 다음 위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도와 獨島’를, 아래에는 국제 해도에서 독도를 지칭하는 LIANCOURT(리앙쿠르)란 프랑스어를 파넣은 화강석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표석은 1년 전인 52년에 설치하려다 못한 것이라 뒷면에는 1952년 8월15일을 뜻하는 영문이 새겨져 있었다. 대신 한국산악회는 표석 옆면에 표석을 실제 세운 날인 53년 10월15일을 추가로 새겨넣었다.


이 표석은 1년 전인 52년 8월15일 설치하려고 준비했던 것이라 뒷면에는 ‘15th AUG 1952’(1952년 8월15일)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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